여강선원에 걸린 4대강 반대 판넬
여강선원에 걸린 4대강 반대 판넬 by 심상정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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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 리
                                                             김진경
밭에 거름을 낸다.
그 냄새만 맡으면 참 지독한데
그게 흙의 습기와 바람과 햇볕과 섞이면 왜
나무며 고사리며 칡이며 온갖 것들의 뿌리에서 나는
그 축축하고 좁 맵기도 하고 구수한 냄새로 되는지 모르겠다.

흙과 거름과 바람과 햇볕 속에는 
뿌리보다 먼저 뿌리 같은 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흙의 작은 구멍 속에
콩을 떨어뜨리고 잘 덮어준다.

머잖아 콩들도 흰 실뿌리를 뻗으리라.
그 실뿌리들은 꼭 콩에서 오는 것도
그렇다고 저 무뚝뚝한 
흙과 거름의 알갱이로부터 오는 것도 아닐 게다.

콩 속에는 콩속에 갖히는 것을 싫어하는
흙과 거름 속에는 흙과 거름 속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작은 무언가가 살고 있어
이 작은 것들이 콩과 흙의 경계를 가까스로 뚫고 나와
조금씩 조금씩 희 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그래서 삽질을 하다 콩의 뿌리를 다치기라도 하면
콩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를 다치게 한 것처럼 가슴이 뛰는 게 아닐까?
그때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다치게 한 그 작은 영혼들을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김진경의 [지구의 시간]시집의 시중에서 

창의성이 넘치고 지속가능 사회는 이대로 가능한가?

모내기를 할때였습니다.
허리를 부러져라 모를 날르고, 못줄을 잡고 동네아저씨들의 노랫소리를 들다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옵니다. 누엿 누엿한 논들에 모내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힘을 다해 뚜어다니다 느끼는 느낌.
그냥 좋다였는데 오늘 다시 그때를 떠올려 보면 
쌀밥을 먹기위한 뭔가 대단한 일을 마무리하는 만족감, 
만족감을 더해주는 어둠이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
출출한 배와 아픈 허리와 손가락을 이제는 쉬게 할 수 있다는 안도감 등 여러가지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 놓치고 있었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진경시인이 하시는 말씀처럼
그 벼를 키우기 위한 햇볕, 물, 바람, 흙, 많은 벌래들의 노고는 
변함없이 지금도 제가 그리워하는 그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것이 그들의 숙명이겠지요.

자라면서 그 배움을 몸은 느끼고 있었구나!
어쩌면 보이지 않는 그것에게 냄 맘도 배우고 있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시멘트와 삽을 통한 한국사회의 급성장은
과거도 지금도 앞으로도 상처가 나고 있고, 
그 상처로 인한 배움의 기회를 상실한 아이들이 과연 창의성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강을 마구 파해치는 사람이 해와 땅과 바람과 물, 그리고 벌래들의 고마움을 가르칠 수는 없지요.
그리고 그런 사회가 다시 생명살림을 하자고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원상복귀 시킨다고 과연 현재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창의성의 원초적 통찰은 그것들에게서 배워야 하고, 
그리고 지속가능 사회는 더불어 사는 지혜(허락한 범위에서만 사용하고 다시 재생하게 하라)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다 파괴시키고 돈으로 살리자라고 할때 그 책임은 파괴자에게만 돌아가면 그래도 다행인데,
생명 모두에게 되돌아오는 경고를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요? 

4대강을 손대는 것은 우리민족의 핏줄을 해집어 놓는 것입니다.
일본놈들이 우리민족의 산(정기)에다 박아 놓은 못보다도 강한 아픔에 떨 우리의 강(핏줄)들을 생각하니 답답합니다.
산에다 못을 박아 일본놈들이 노린 것은 항일운동의 근간인 민족 정신을 억누르려는 음모였다면
강을 파괴하면서 시멘트로 봉인을 하는 짓은 소통의 물결 창의의 물결을 봉인하려는 음모입니다.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Posted by 구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