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마케팅기획을 계속해오면서 판매만을 생각했다. 어느 날은 쓰레기도 팔 수 있다는 자기도취에 빠져 미친짓도 감행(?)을 했다. 어떻게 하면 매출을 늘릴 수 있을까?가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다 보니 점점 회사도 어려워지고, 내 자신도 병들어 감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는 순간은 이미 늦어 버렸다.

Made in China의 제품들을 보고 비웃고, 거기서온 음식들이 문제가 되어 메스컴에서 나라가 온통 낼 부터 먹을게 없을 듯 요란을 떠는 것을 보면서 "정말 나쁜사람. 어떻게 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을 쳐!!!"하면서 나는 안그런냥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랬다. '먹는 것만 아니면 되지 않나?'가 시작이었던것 같다.

[반성] 기존 사업들을 정리하고 이것 저것 고민을 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내의 도움으로 정말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무엇을 해도 사람들에게 해악이 되는 열정일 것 같았다. 슬펐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와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가지 해 준 사업의 어려움"이라는 두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졸업을 할때 IMF라는 사건은 취직이 어렵게하는 원인이었다. 무엇이든지 해서 먹고 살아야 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경재적 자립을 해야했다. 그래서 영업을 시작했고, 사업을 했다. 60여명의 직원들을 먹여살리는 영업사원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팔아야했다, 생산을 하는 회사가 아니니 마진을 많이 주는 제품을 팔아야 했다.

하지만 핑계였다. 정말 중요한 것을 모르는 바보였다. 노무현대통령님을 좋아하면서도 왜 좋아하는지를 몰랐는데, 돌아가시고나니까 확 와닿는 것이 있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 같다고 느끼며 쓰레기를 파는 내 자신은 항상 "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욕망보다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이 컷다. 왜냐하면 힘들기 때문이다. 점점 편리를 추구하는 생활, 관계, 목표들은 쉬운 것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려워도 옳은 길이 아니라...하지만, 옳은 길을 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항상 그리워 한 것 같다. 그 그리움을 대신해주는 노무현대통령님이 좋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이랬다. 매일늦게 들어오던 아빠가 일찍 들어오니까 어색해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일안해? 일하느라고 늦게 들어오는 아빠가 싫었는데 일 안하는 아빠는 더 싫다." 그래서 "아빠는 앞으로 일해도 일찍 들어오는 아빠가 될거야!" 라고 이야기하니까 웃으면서 놀아주기 시작했다. 매일 자신들을 지키는 엄마와는 틀리게 언제든 사라지는 아빠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아빠의 변화는 아이들이 가르키기 시작했다. 먹거리(라면 안돼,답배는 조금), 독서습관, 차를 팔고 대중교통 이용하기, 커피를 줄이고 차마시기등등... 그러면서 배웠습니다. 누구든지 잘 먹고 잘 소비하는 권리가 있구나.  그러면 행복은 찾아오는구나.

[행복, 그리고 다시 시작] 요즘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 새롭게 시작한 교육사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배운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 좋은 서비스를 잘 만들면 된다. 그리고 직원들도 좋은 서비스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행복해 한다.

(수익중심 일터) : 생산 없는 많이 팔기 = 과잉소비+불 필요을 필요로 만들기(쓸데없는 일)

(행복한 일터) : 적당한 생산물 필요한 곳 제공하기 =  완전교환+소비를 통한 불필요 없애기(소비자까지 생산적인 일)    

출발은 사람에서부터인것 같습니다.
특히 교육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입시지옥, 유아부터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의 삶, 특목고, 언어연수, 유학, 서울대등 교육을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언어들...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기업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못배워서 고생한 부모가 선택한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려면 배워야 한다"는 개똥철학이 문제일까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누구든 잘 먹고, 잘 배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문제, 환경적 문제(부모, 지역등), 본인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교육은 다양해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면, 다양성의 보편적 잣대가 필요는 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본질을 못보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교육을 좋은 먹거리로 비교해 봅니다.

1. 경제적 문제 
좋은 먹거리는 무엇인가? 자연 그대로의 것을 먹는 것이다.(근본적 사유) 그리고 정성을 들여 만든 것들이다.(생산자의 진정성)  
생산자와 친분을 맺고, 생산되는 먹거리에 되도록이면 첨가물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면 더 싸지고 더 좋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대량생산을 통한 기업의 돈벌이가 주가 되는 교육은 언제든 불량식품이 들어올 여지가 있다. 그리고 비싼 먹거리는 소수의 전유물이다. 아니 그렇게 변화해 왔다. 프라스틱 쪼가리를 대량생산하여 싸게 만들듯이 먹거리와 교육을 그렇게 대량생산 할 수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좋은 먹거리처럼 교육도 많이 먹는다고 싸다고 현혹 될 필요없다.

2. 환경적 문제
좋은 먹거리를 먹는데 환경은 어떤 의미일까? 농어촌이면 좋은 먹거리를 먹는다? 그러면 서울이면 좋은 교육을 받는다? 부모가 농사꾼이면 좋은 먹거리를 먹는다? 부모가 교육자면 좋은 교육을 받는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좋은 선생님이나 그에 맞는 환경을 만들면 된다. 좋은 먹거리를 위해 텃밭을 만들거나 자매결연을 맺어 적극적 수용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좋은 먹거리이상의 배움이 생긴다. 일종의 수용의 자세가 바뀐다. 좋은 먹거리는 돈으로도 해결을 할 수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서 소중한 것의 가치가 바뀌게 된다. 물론 교육의 문제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외부적환경보다 수용적 환경이 중요한 것은 다르지 않다. 좋은 학교(남들이 이야기하는 명문고나 명문대)가 목표라면 환경적 요인이 클 수 있다. 배움의 목표가 다른 곳에 있다면 분명히 수용의 자세가 바뀐다. 좋은 교육이 목표라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좋은 스승과 환경을 만들면 된다.

3. 개인적 성향
생식을 하거나 육식을 하거나 초식만을 하는 등의 먹는 취향에 다라 좋은 먹거리는 사람에 다라 틀리다. 교육도 암기를 잘한다고 하거나 예술적 감각이 튀어나거나 이해력이 남들보다 높은 것과 같이 개인에 따라 틀리다. 초식을 하는 사람에게 육식은 돼지고기보다 소고기가 좋다라고 애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모를때 너무 집중된 교육을 받는 것도 배탈이 날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숨은 재주가 뒤늦게 나타났 수 있는 것을 미리 차단 시 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인적 성향을 외향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먹지 못하는 고기를 강제로 먹이다 보다 반발심에 의해 탁월한 육식가의 자질을 타고났어도 평생 고기 한점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강제적 수용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늦더라도 기다려 주는 인내가 필요하다. 혹자는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라면 반드시 혼자서도 자신의 본능을 개발 할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키운 호랑이는 절대 사냥을 할 수 없다.    

좋은 먹거리는 내 아이가 먹는다고 많은 시간을 공들이는 농부의 마음과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먹는자의 노력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하면, 좋은 교육은 아이의 성향에 맞는 적성을 살리는 것에서 출발하여 스스로의 배움의 목표가 정해지면, 그 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최대한 다양하게 공급해주는 스승과 부모가 있으면 가능하다.


아내는 아직 어떤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화상과외+인강을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음의 두가지 목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1. 왜 공부를 하는 지 고민인 아이에게 그 이유를 찾게 되와준다

2. 배움의 욕구가 높은데 경제적 또는 환경적인 문제가 있는 아이에게 저렴한 질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목표에 어떻게 하면 접근 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는 삶은 즐겁다. 행복하다.
 
Posted by 구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