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사랑하자>


아름답다의 사전적 의미

1.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

2.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요약>감각, 특히 시청(視聽)을 매개로 얻어지는 기쁨 ·쾌락의 근원적 체험을 주는 아름다움.

[출처] 두산백과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1위가 지구 


  뜸금없지만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추함이다. 추함을 생각해 보자. 그래야 더 아름다움의 의미가 드러날 듯 하다. 추함과 비슷한 느낌의 말은 불쾌함, 끔찍함, 소름끼치는, 역겨움, 비위에 거슬리는, 혐오스러움, 더러움, 무시무시한등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추함은 미개함 또는 정리되지 않은, 더러움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판자집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고, 노숙자와 노점상을 밀어내고 단속을 하고, 뱃속의 비갯덩어리를 기계로 뽑아내고, 얼굴을 칼로 고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고,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고, 미인을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로 인해 인위적 아름다움이 아닌 것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도망치듯 외면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산업화, 도시화과정에 매스미디어로 소통을 하면서 화면뒤의 모습을 가리고, 쪽방촌을 가림막으로 가리는 형태의 미학을 쫒는 사회에서 '아름다움'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자. 그 현상으로 먼지알레르기(더러움에 대한 증오)라는 병에 걸린 사회를 살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도 그 병으로 인해 먼지없고 숨막히는 방안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틀고 TV를 통해서 소통한다고 느끼는 비정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심지어 정돈되지 않은 사고를 하는 사람에 대한 시선도 결벽증에 가깝다. 

  과연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더럽고 추함에 대한 조작된 정보를 통해 아름다움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는 돈들이지 않고 길바닥에 않아서 놀던 자연스럼움도 쇼윈도우안으로 집어넣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누군가의 의도에 맞추어 진정한 아름다움을 잊고 산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돈버는 마케팅을 할때 이 추함에 대한 경멸의 조장은 마법과 같이 돈다발을 안겨준다. 예를들면 건물주는 노점상을 밀어내고 임대료를 올리면 되고, 건설회사는 판자집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올리면 사회적 지위도 올려주는 서비스를 포함해서 비싼 가격에 아파트를 판매한다. 그리고 성형외과는 어떤가? TV에 성형미인을 주인공으로하고 뚱뚱한 사람을 놀리면 성형고객이 줄을 선다. 생가해 보면 아주 많은 곳에서 우리는 추함에 대해 경멸하라는 명령에 충실한 돈내는 소비자가 된다. 

  특히 매스미디어는 이쁘게 포장한 가짜 아름다움을 꾸준히 조장하여 광고비를 받고 유지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사회전체가 미쳐있다고 이야기하면 무겁고 지루한 이야기라고 먼지보듯 경멸을 한다. 그들(?)이 정한 길을 벗어난 모든 것은 추함으로 인식되고 누구도 합의하지않은 미학의 상품들을 쏟아내고 소비하면서 행복하다고 위로하고 산다. 교육도 종교도 먹거리도 에너지도...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 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보는 사회는 산업화사회부터 일 것이다. 우리는 기회주의적인 비정상 권력이 정보를 차단하고 수출을 외치던 때부터인 것 같다. 그 때부터 공동체는 오래된 액자속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교육받고, 누구나 공장에 취직하여 보이지 않는 소비자가 먹을 초코파이에 침을 뱉으며 동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1980년 전후로 해서 더욱 가속화 되어갔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1997년 IMF시대부터 느끼는 사람들은 일부있었다)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그 비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부자가 되어 비정상의 대장이 되자는 거품이 꺼지면서 우리사회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삶부터 다시 바라보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럼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일단 다른 이의 글을 읽어보자. 

(출처) 유영만의 지식임신클리닉


아름다움’의 네 가지 의미


첫째,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이라고 합니다. 천영희 시인의 말입니다. 상처를 알고 슬픔을 삭인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앓고 난 뒤의 ‘사람다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앓는 동안 아픔의 상처가 흔적이 되고 그 흔적은 시간과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이 됩니다. 한 해 동안 우리 모두는 많이 아팠습니다. 그 아픔의 넓이와 깊이, 종류와 성격은 모두 다르지만 그 아픔이 우리 모두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압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이 주는 고통을 감싸 안아줄 수 있습니다. 진주조개의 영롱함과 아름다움은 진주조개 속살에 생긴 상처를 메워가면서 탄생된다고 합니다. 진주의 아름다움은 진주조개가 견뎌낸 자신의 상처 덕분입니다. 상처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상처가 스승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말입니다. 상처로부터 배우는 사람, 아픔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아름다움의 어원적 의미는 포옹하다를 의미하는 ‘안다’에 나왔습니다. ‘안다’의 접미사 ‘음’이 붙어서 ‘안음’이라는 말이 생겼고, 이것이 다시 운율적 매끄러움을 위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탄생했다는 주장입니다.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분수를 아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분수를 저버리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아름답지 못하고 추해 보입니다. 내가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분수를 알아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한 겨울의 추위가 아무리 추워도 따뜻한 가슴의 온기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내 품의 따뜻한 온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관계,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안아 줄 수 있는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안음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자연 삼라만상 모든 것이 내 뜨거운 가슴의 언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적 느낌이 머리로 분석하는 논리적 앎을 이깁니다. 가슴은 따뜻하지만 머리는 차갑습니다. 머리로 계산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안아야 됩니다. 


 세 번째 ‘아름답다’의 의미는 ‘알밤답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밤은 밤까시로 뒤덮여 있습니다. 접근 자체를 거부하는 밤송이 속에 먹음직스러운 알밤이 숨어 있습니다. 알밤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밤송이를 까야 됩니다. 험상궂은 밤송이 안에 너무도 아름다운 밤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톨을 그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밤톨이 매끄럽지만 딱딱한 껍질로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밤톨을 덮고 있는 껍질을 까면 이제 ‘보늬’라는 또 다른 껍질로 싸여 있습니다. 보늬는 밤톨 껍질보다 훨씬 보드랍지만 그냥 먹기에는 텁텁한 맛을 내기에 힘들지만 벗겨내야 합니다. 보늬는 밤톨에 단단히 달라붙어서 생각만큼 쉽게 벗겨지지 않습니다. 착 달라붙어서 밤톨을 감싸고 있는 보늬를 정성스럽게 벗겨내야 비로소 하얀 속살을 지닌 알밤이 정체를 드러낸다. 저마다 깊은 뜻을 지닌 세 겹의 껍질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벗겨내야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었던 알밤이 모습을 드러낸다.

“겉모습으로 보고는 험상궂어서 쉽게 다가갈 마음도 먹기 어려운 밤송이를 한사코 벗겨내고, 한결 나아졌지만 그래도 매끄럽고 딱딱한 밤톨의 껍질도 애써 까내고, 한결 더 부드러워졌지만 텁텁하여 입에 대기 어려운 보늬까지 벗겨내고야 만날 수 있는 알밤. 세 겹의 만만치 않은 껍질을 벗기고 들어온 이에게는 하얗고 깨끗하고 단단한 속살과 고소하고 달콤한 맛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알밤. 그런 알밤은 온통 보얀 살결로만 이루어져서 어디를 뒤져 보아도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하다. 겉으로 드러내어 떠벌리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좀처럼 닿아볼 수 없도록 겹겹이 깊숙하게 감추어진 알밤. 이런 알밤을 우리 겨레는 아름다움의 참모습으로 알고, 이런 알밤다우면 그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 여겼다”(김수업, 2009, 우리말은 서럽다, p.297).

 알밤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시간과 더불어 향기를 뿜어냅니다.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는 각고의 노력 끝에 생기는 알밤과 같습니다. 알밤의 아름다움은 밤의 알맹이에서 비롯됩니다. 껍질과 껍데기로 뒤덮인 허식과 치장을 걷어내고 드러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핵심은 단순하지만 언제나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밤송이-밤톨 껍질-보늬를 벗겨내야 비로소 드러나는 알밤의 아름다움에서 우리는 자기 정체성의 본질을 배워야 됩니다. 자기 정체성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형성되어 나갑니다.


네 번째 ‘아름답다’의 의미는 ‘알다’(知)라는 동사 어간에 ‘음’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고 합니다. ‘알음’(知)에 ‘답다’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아름답다’의 어원에서 보면 아는(知)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아름다운’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모름다움’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추한 사람입니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나는 사물과 개념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근원적인 탐구의욕을 갖고 있는가? 아름다움은 지식은 숙지성(熟知性)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지식이 얼마나 숙성되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지식 여부가 결정됩니다. 나의 지식은 내가 숙성시켜야 내가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숙성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숙한 원숙미가 드러납니다. 나는 도처에 산재한 정보를 내 지식으로 숙성시켜 내면화, 체화, 육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 안아주다가 큰 코 다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제대로 모르면 안아줄 수 없습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주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아픔은 사연을 들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사연과 배경이 깃들어있는 아픔을 깊이 보듬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를 안아줄 수 있습니다.


 "앓음다움, 안음, 알밤답다, 알다" 다 맞는것 같다. 사람을 먼저 생각해 보자. 

  첫번째 상처가 피원낸 꽃이란 말은 사람도 상처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이유는 없다. 특히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들은 모든가 어려움을 극복하며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  



  두번째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분수를 아는 마음이다. 아이가 지나가다가 넘어지면 달려가서 도와주고, 노인이 무거운 것을 들고가면 들어드리고, 특히 과일을 떨어트리면 모두가 달려가 그 것들을 주워주는 마음 아닐까? 그런 모습은 이유없는 행동이고, 그 모습은 우리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세번째 진정한 아름다움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하기때문이 아닐까? 매일보는 우리동네 길보다 외국의 사진속 가로수 길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등산을 하다가 인적이 없는 곳을 만나면 문득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그 곳은 모두가 틀리게 느낀다. 각자의 마음속에서 본인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다.


    

  네번째는 아는(知)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라고 한다. 가족사진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낀다. 매일보면서도 익숙함일 수도 있다.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을 보면 반갑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특히 지구를 아름답게 느끼는 이유도 그 속에 본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진처럼 낯선 외국인이지만 가족사진으로 보면 아름답다. 가족이라는 앎의 공유때문인 것 같다. 



  위의 네가지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에 대한 표현이 서툴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특히 지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는 것을 적용해 보자. 지구안에는      상처속에도 아름다운 내가 있고, 아는 사람이 있고, 이유는 모르지만 아름답다고 느낀다.      

  

  아름다움에 대해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틀려도 비슷한 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렇다. 아름다움에는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대상은 눈물도 있고, 감동도 있고, 보호하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간에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아름다운 일주일>    



  절대적 아름다움은 없다. 하지만 우리주변의 아름다움을 매일 벗하면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안을 수 있는 자기분수에 맞는 욕망을 꿈꾸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했지만 아름다움을 당연하게 느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본다. (시간=달력=천문학) 그래서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를 상징하는 순환하는 일주일의 의미를 아름다움에 맞추어 정리해보았다.


0.지구일[사람] :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곳. 일주일에 지구를 추가해야 사람이 존중된다. 다른 표현으로는 '나'인것이다. 가상의 요일로서 지구일을 추가하면 아름다운 일주일이 된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1.월요일[느림, 달] 'day of moon'(달의 날)

 속도를 버리고 걷기를 통한 자신을 찾아가는 요일 
2.화요일[전쟁, 불] 전쟁의 신 'Tyr' '마르스(Mars, 화성)' 
커다란 집의 주인이란 의미로 꿈을 찾아가는 요일 
3.수요일[상업, 물] 상업의 신 'Wodin' 머큐리(Mercury, 수성)
 하는 일의 사회적 가치를 찾아가는 요일 
4.목요일[벼락, 나무] 벼락의 신 'Thor'쥬피터(Jupiter, 목성)
 음악(소리)을 통한 창조적 마음을 찾아가는 요일
5.금요일[사랑, 쇠] 사랑의 신 'Friya' 비너스(Venus, 금성)
 쇠를 녹이는 사랑으로 타자를 찾아가는 요일
6.토요일[농업, 흙] 농업의 신 'Saturnus' 새턴(Saturn, 토성)

함께 땅을 만지면 축제를 하는 요일

7.일요일[휴식, 해] 'day of sun' (해의 날)

자연을 통한 치유를 하는 요일













Posted by 구라다